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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서랍[LIFE]/맛집

광주 투어 3탄: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전일빌딩(5.18 메모리얼 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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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투어 3탄: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전일빌딩(5.18 메모리얼 홀)①

안녕하세요~~림온니에요~~^^

전 이번 가을에 광주투어를 해보았답니다 ㅎㅎ 제가 사는 지역인데도 몰랐던 곳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그래서 제 고향 광주를 더 알고자 여기저기 다녀봤어요~~

일정은 다음과 같답니다^^

광주 당일치기 뚜벅이 여행

일정: 광주사직공원-양림동역사투어+펭귄마을-5.18민주화운동을 찾아서(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일빌딩)-광주시내에서 선셋보기~!!

여러분 혹시 다크투어리즘을 알고계시나요?

**다크투어리즘**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하며, 국립국어원에서는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 다듬기를 하였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용어는 1996년 <International Journal of Heritage Studies>라는 잡지의 특별호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2000년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글래스고 칼레도니언 대학(Glasgow Caledonian University)의 맬컴 폴리(Malcolm Foley)와 존 레넌(John Lennon) 교수가 함께 지은 <Dark Tourism>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현재 박물관으로 바뀌었는데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생체실험실·고문실·가스실·처형대·화장터와 함께 희생자들의 머리카락과 낡은 신발, 옷가지가 담긴 거대한 유리관 등을 살펴보고, 나치의 잔학상을 기록한 영화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그밖에 미국대폭발테러사건(9·11테러)이 발생했던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부지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원자폭탄 피해 유적지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약 200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만 명의 양민이 희생된 제주4·3사건의 실상을 알려주는 제주4·3평화공원을 비롯하여 국립5·18민주묘지,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크 투어리즘 [Dark Tourism] (두산백과)

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폴란드 여행때 엄마와 방문을 했었는데요... 그날의 그 기억은 너무 끔찍해서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어요..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가해자인 독일인들은 그때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 어릴때부터 그 역사를 배우고 수학여행때마다 학생들이 그곳을 방문한다는거에요.. 제가 갔을때도 독일의 학생들이 관광버스로 많이 방문을 했어요. 끊임없이 반성의 시간을 갖고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교육을 하는 독일을 보면서 일본과 우리나라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어요.. 정말 일본이 빨리 우리나라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답니다.

세계적으로 세계2차대전의 피해국으로 유럽쪽 나라들만 집중 조명되었는데 아시아쪽의 피해도 굉장히 많았잖아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아시아 쪽의 피해도 많이 재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자기의 욕심때문에 같은 민족을 거의 학살하다시피한 518이 자동으로 떠올랐답니다.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광주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무고한 희생양이 엄청나게 발생했는데도 너무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사는 사람을 보니 더 화가나더라구요.

그래도 그날의 아픔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광주를 넘어 전국 그리고 전세계에 그날의 참상을 알릴수 있고 어떻게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었는지를 이제라도 제대로 알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먼저 518 민주화 운동에 제대로 알려면 이곳에 가야합니다~

바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랍니다.

1.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주소: 광주 동구 금남로221

운영시간: 매일 9:00~18:00(월요일 , 설날, 추석, 1월1일 휴관)

입장료:무료

해설시간표: 10시/11시/14시/15시/16:30분 

 웹사이트 : www.518archives.go.kr-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온라인전시관 Online Exhibition

www.518archives.go.kr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된걸 나타내 주는 비석 ㅎㅎ 그리고 518민주화 운동 기록관의 외관이랍니다~~

평이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오픈되면 무료관람이에요~그리고 월요일은 휴관이랍니다~^^

개인적으로 꼭 해설을 들으셨으면 좋겠어요~~해설을 들으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수 있고 몰랐던 이야기까지 알려주셔서 너무나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었어요~~꼭 시간대 맞춰서 들으시길 바랍니다~해설 시간은 40여분 정도에요~해설을 듣고 다시 전시관으로 돌아가 하나하나 세세히 보시면 더 좋답니다~

외국어 해설도 가능하니 필요하시면 일주일전 예약을 해야한다고 합니다~그리고 15명 이상일 경우 최소 하루전 연락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저도 들어가서 열체크를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해설시간이 되길 기다렸다가 해설을 들었습니다

입구에 바로 이런 유리창 2장이 안에 있어요~

이 깨진 유리창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518 당시 광주은행 본점의 유리창인데 계엄군의 총탄에 구멍이 난 이 유리창을 교체하지 않고 1997년 광주은행 본점이 이사갈때 광주광역시에 기증을 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십여년이 지난 시간까지 교체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건 증거기 때문에... 광주은행에 근무하셨던 그분들도 광주 시민이시기에 이것을 기억하고 증거로 남겨놓고 싶으셨던 거겠죠~

그래서 이것이 지금의 소중한 증거중 하나로 남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입구에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된 안내 팜플릿이 비치되어있어요^^

 

해설사 선생님을 만나서 인사하고 본격 투어시작~!!

이 기록관의 1층 바닥과 벽면은 1980년대 카톨릭센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했다고 해요~

518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있는 이건물~~

518 당시의 구 도청 모습~~

현재에도 광주에서는 큰 행사 즉 2002 월드컵때도, 촛불시위때도 항상 저 변함없는 옛 도청 앞 분수대에서 모여서 함께하지요~

518은 그냥 5월 18일에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며칠전부터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학생중심의 시위였다~하지만 전두환은 군부를 이용해 이것을 폭동으로 만들어 당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대통령과 광주를 엮어서 없애려고 했던 계획적인 일이었다.

당시 계엄군에게 이유없이 총탄과 폭력으로 희생되신 분들이 계속 화면을 비추었다. 사망원인은 총살과 구타로 인한 장기손상 및 탈골등 어마어마했다... 보는데... 참... 참담한 심경을 말로 할수 없었다..

한밤중에 날벼락처럼..길거리를 걷다가 무차별적인 구타와 어디서 갑자기 날라온 총탄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바스러졌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나타내는 사진자료들입니다~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의 계속되는 무차별적인 학살에 맞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 시민들까지 생존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으며 그 당시에도 맨손으로 돌을 쥐고 항의를 했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건 무자비한 총알세례였습니다. 총에 창검까지 달아 쓰러진 사람들을 찔러 트럭에 실었습니다.

보다못한 시민들은 예비군 훈련소에 있던 낡은 총들을 가지고 맞서 싸웠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지만 이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언론들은 이미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소식들은 단한줄도 방송에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정치권에서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 시민들은 광주내에 일어나는 일들을 알리고 소통하기 위해 직접 투사회보를 만들고 광주 곳곳에 뿌렸습니다.

워낙 다치고 총상환자들이 많다보니 병원마다 피가 부족했습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팔을 걷어부치고 학생부터 어른까지 모두 수혈에 동참했습니다

또한 시민군들은 서로 순찰을 돌고 시민보호와 질서유지에 힘썼습니다.

슈퍼를 하시던 분은 본인의 가게에서 쌀과 라면 식재료등을 무상으로 직접 도청앞으로 날랐으며

많은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밥도 못먹고 시위를 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당시에 이곳에서 계셨었는데 이렇게 말하시더라구요~

저희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매일매일 주먹밥을 만들어 길에서 나누어 주었으며

총탄이 주택가로 날아오기에 무서워서 사방 벽에 솜이불을 걸어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계엄군이 항쟁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택가에도 무차별 폭격을 했다는 증거이지요 실제적으로 집에서 벽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희생되신분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저희 아빠도 금남로에 나가서 맞서 싸우셨다고 합니다.

저희 큰아빠는 518 유공자 이십니다~정말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저희 가족이 겪은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깝게도 첫번째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남성분이었습니다. 그날은 그분의 딸의 돌잔치여서 잔치가 끝난후 손님들을 배웅하고 가는길에 무차별적으로 구타를 당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여고생은 피가부족하다는 말에 헌혈을 한 후 돌아가는 길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리고 518때 행방불명자 중 어린이와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이들이 총을 들고 싸운게 아닌데... 과연 그냥 행방불명일까?

계엄군이 시내를 빠져나가면서 개미새끼한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광주시를 에워쌌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들 계실거다. 이건 영화 택시에서도 나왔던 이야기니까..

이때 가족단위로 광주를 벗어나기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버스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바로 그들의 총앞에서 총을 맞고 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엄군은 이들을 어딘가에 암매장을 했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들은 아직도 행방불명자로 분류되고 있다..

과연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을 쏴 죽인것이 정당방위인가.. 이것을 용서받을수 있다고 생각할까..

정말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수록 참담함을 감출수 없었다 ㅠㅠ

어디에 묻힌지라도 알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일부 유족들은 전국 방방 곳곳을 다니며 이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ㅠㅠ 정말 마음이 아려왔다 ㅠㅠ

정말 감사하게도... 광주시민들이 대단하게... 이 기간동안 약탈이라던지 범죄사건은 1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졌다는게 너무 감사했다.

지금의 코로나 19사태와 비교하면 이런 저력이 있어서 다른 나라들은 물건사재기등 범죄와 약탈이 빈번한데 우리나라는 화장지 사재기나 물건등의 사재기는 1도 없었다.

당연한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수 있으나 이건 정말 대단한거다.. 정말 우리의 시민의식은 세계 상위권 안에 드는 수준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입증한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죽을거라는걸 알면서도 사지를 향해 걸어갔다.

나라면 어땠을까? 난 내가 죽을걸 알면서 저 길을 갈순 없을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결연하게 그 길을 갔으며 노약자와 여자들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라고 했으며

훗날 증인이 되어서 이날을 증거하라고 했다.

이런분들이.. 그리고 민주화를 열망하며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온것이지 

그저 역사책속의 단 몇줄로 단시간에 현재의 우리나라는 만들어 진것이 아니다..

정말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특히 광주시민이라면 더욱더..

그날의 금남로 도로를 재현해 놓은 곳..

쓰러진 시민들을 총에 꽂힌 대검으로 찔러서 트럭에 실었다고 함. 확인사살을 한거라고 함.. 저건 재현해 놓은 모형이지만 모형만 봐도 당시의 처참함을 생생하게 느낄수 있었다 ㅠㅠ

위 사진의 오른쪽 남자분이 바로 청각장애를 가지셨던 희생자분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김현경의 일기장. 이것 또한 증거물중 하나.. 이런 기록들이 차곡차곡 모여 그날의 진실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유네스코에도 등재될수 있었다.

화려한 휴가... 영화로도 알려진 내용이다. 아래의 여성분은 임산부로 막달이었는데 이마 정중앙에 총을 맞고 사망하셨다. 결혼식때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이마 정중앙에 총을 맞았다는 것은... 그냥 난사된 총이 아니라 조준사격을 당한것이다... 임산부가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을터... 이것도 정당방위라 우길수 있을까?

쓰러져간 채 피지도 못한 청소년 희생자들... 이분들을 보고있자니 분노가 치민다..

이런 잔인한 손속앞에서... 힘없는 임산부가.. 청소년들이 쓰러져 가는데 손놓고 있을 어른이 어디있을까?

살기위해 이분들은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총을 들게 된것이다.

영화 택시에 나온것처럼... 시외로 나가는 도로를 봉쇄하면서 개미새끼 한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중 하나가 바로 이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다..

무차별적인 집중사격을하고 부상자들을 끌고가 대검으로 찔러죽이고 매장을 한 사건이다.

이 버스에 과연 어른들만 타고 있었을까?

 

시민군들을 끝까지 맞서싸웠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초석을 닦았다. 우리는 이분들의 희생을 기억해야만 한다.  언론탄압으로 우리나라 방송과 기사에는 광주시민의 폭동으로만 나왔지만.. 

진실은 결국 드러나는 법이죠..

우리나라에 있었던 외국인 기자들을 통해 이날의 일들은 외신보도로 전세계에 결국 알려지게 됩니다.

이분들의 사진과 영상자료 그리고 기사들은 바로 진실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고 무엇이 진실인가 속속들이 판별할수 있는 귀한 증거가 되었으며 이것들로 인해 유네스코에 등재될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수 없습니다.

책에 나온 사실몇줄.. 그리고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 조금으로는 이날의 참혹한 진실을 뼈져리게 피부로 느낄수 없었어요..

시간이 되신다면 꼭 이곳을 방문해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제대로 느끼고 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해설을 듣고 직접 경험했던 이날의 참상을 이야기 하더라구요..

참 좋은 공부가 되었을것 같았습니다.

슬프지만 꼭 알아야 하는 외면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되는 진실을 마주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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